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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직장수난사

직장 수난사 3편 - 정주고 마음주고 돈까지 준 세번째 연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기회는 포기하는 순간에 오죠. 내내 짝사랑하던 남자가 평생 거들떠 보지도 않아서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남자를 선택했는데 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그 짝사랑 남이 실은 널 좋아했네 어쩌네 하면서 여자를 막 흔들잖아요.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쩌시겠어요? 이 사람 말고는 날 거들떠 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는데 페로몬을 마구 뿌리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거죠. 처음에는 내 사람이 아니다 했는데 어이없게도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네가 필요하네 어쩌네 하면서 마구 작업을 걸어주는 겁니다. 

세번째 회사와의 연애가 그랬습니다. 

돌아간 회사에서 저는 매우 달콤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직장 생활 최초로 회사 가는 게 마냥 즐겁더군요. 주말이 싫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예전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들, 다시 돌아가도 분명히 고민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문제들도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평생 구경하지도 못하리라 생각한 매력남이 등장했습니다. 일명 T프로젝트로, 남자에 비유하자면 모델 포스에 3개 국어를 구사하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예정인 대기업 막내 아들 정도랄까요?

당시 그 프로젝트는 사내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였고 저는 그런 엄친아 주위를 얼쩡거릴 수 있다는 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T프로젝트와 두번째 회사를 두고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오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죠. 그런데 한 회사였지만 애초에 별개였던 둘의 관계는 제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었고 결과적으로 둘은 껄끄러운 결별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저는 그 중간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실 세번째 회사 얘기는 매끄럽게, 이성적으로 정리해 쓰기가 참 힘이 듭니다. 감정적으로 고된 시간이었고 제 인생에 어쩌면 실패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더 희화해 적어놓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지난 일이고 저는 그때 일을 소중한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두번째 회사(편의상 S)와 T프로젝트(편의상 T)는 연결고리는 있었으나 개별 주체였습니다. T가 워낙 출중한 외모에 막강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탓에 많은 사람들이 T의 손을 들어주었죠. 그러나 T의 상속 가능성에 의심을 품는 이가 있었고 실은 저도 그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T의 불확실성에 대한 제 의심은 그러나 도전에 대한 두려움, 패기 없음으로 종종 치부되었고, 못 오를 나무는 없고 열번 찍으면 넘어오게 되어있다는 주변의 권고가 제 귀를 팔랑거리게 하더군요. 거기에 멀어만 보이던 T가 어느 순간 코 앞까지 다가와 네가 필요하다고 뻐꾸기를 날려주니 저 같은 평범녀는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었던 거죠. 콩깍지가 씌여 오로지 T만 보이고 T와 함께 할 미래만 그리게 되는 겁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떻게 선택한 S인데 그 S를 이렇게 배신하다니요. 그 생각만 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T가 원하는 게 정말 나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죠. 왕자를 만나는 신데렐라는 동화에서나 있는 일이죠. 실제로는 그냥 잿투성이인 겁니다. T가 나를 원하는 게 아닌 이유를 매일 열가지씩 댈 수 있었지만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고 곧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고민은 T의 상속가능성이었는데 이걸 고민하는 건 속물 같기에 무시했죠. 상속받지 못해도 내가 꿈꾸던 엄친아는 엄친아라고, 콩깍지 씌이니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참 어리석은 짓이었지만요. ;;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T의 계속되는 회유 앞에서 저는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S에겐 심히 미안했지만 고요히 눈물을 떨궈주고는 T의 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정주도 마음주고, 심지어는 돈까지 주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T는 상속 받기 전에는 땡전 한푼 받을 수 없는 처지로 고된 경영자 수업을 받는 중이었거든요. 그때는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과야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여긴 현실이고 왕자님은 없습니다. 분에 넘치는 기회는 결코 오지 않아요. 이건 희망과는 다른 문제죠. 백만분의 일의 확률은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T의 상속은 실패했고, 그보다는 무한 유예되었고, 저는 별안간 명백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T는 결코 제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요.

약속을 남발하는 남자가 못 미더운 것처럼 잘되면 모두 돌려준다는 회사의 약속은 믿지 말아야 하는구나. 손에 물 묻히게 하지 않겠다는 남자의 다짐이 한순간인 것처럼 이곳이 네 이상의 회사일 거라는 장담은 시작되기 전에는 구호일 뿐이구나. 가난해도 행복할 거라는 연인의 믿음이 애처러운 것처럼 열심히 일해서 떼 돈 벌자, 벌면 우리 이렇게 나눠갖자는 구상은 술자리 썰처럼 허무하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몰랐던 것처럼 새롭게요.

환상은 다행히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약간의 돈과 사람을 잃었고 결국 툭툭 미련을 털어낸 자리에 오도커니 혼자 선 저와 현실을 알았습니다. 나이 먹어 만나는 남자들에게 하나씩 포기해야 할 것이 생기듯 직장 생활이 길어질수록 체념과 초라함이 늘어갑니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발 디딘 자리에서 적응하며, 또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직장 수난사 1편 - 봉사와 다름없던 첫 연애
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
직장 수난사 2-1편 - 매 맞는 아내의 마음?

by 안작가 | 2008/12/29 19:43 | 직장 수난사 | 트랙백 | 덧글(0)

직장 수난사 2-1편 - 매 맞는 아내의 마음?

제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실제로 당시의 남자친구에게 맞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컸던 모양입니다. 그 후에도 한참 만났던 걸 보면 말입니다. 매맞는 아내, 매맞는 남편이 꽤나 많다지요? 그들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는다는군요. 3자가 보기엔 그거 정신병 아닌가 싶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두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자아찾기에 나선 저는 약 10개월간 나름의 자아찾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요. 그 방식이 이제까지의 방식을 벗어날 수 없더란 거죠. 그랬으니 이제까지 하지 못한 자아찾기가 한 순간에 될리가 없었지요.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은 벌써 10여년째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질문이 계속된 사이 저는 저대로, 제 방식대로, 그제까지 익숙한 방식대로 살고 있었으니 되리라 기대하는 것이 더 멍청한 짓이었는지 모릅니다.

일정 기간 과거와의 단절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차는 갈아탔지만 도착지는 같았달까요. 첫번째 직장을 선택했을 때와 두번째 직장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10여개월의 공백(하고 싶다고 생각한 공부를 한 기간이었습니다)은 결과적으로 모두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때마다 저는 성급했고 내게 자신없었고 그러면서 모두 절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지요. 뭔가 하지 않는 것이 불안했을 뿐 언제나 절실하지 않았고, 현실은 이상처럼 만만하지 않고 그렇게 부서져라 부딪히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결국 돌고돌아 제자리였습니다. 

저는 이제껏 한번도 꿈이라는 것을 미화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구요. 2002년 월드컵 때도 가장 마음에 안들었던 카드섹션이 '꿈☆은 이루어진다' 였죠. 꿈은 잠이 들어서야 환상처럼 체험하는 것, 실제로는 현실적인 제약들 때문에 내가 부서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적어도 재미있어 하는 것은 발견했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투신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약하다면 약한 것이고 약았다면 약은 선택이었죠.

그러니 10개월의 시간은 제게 일말의 자신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받아주기에는 나이도 많고 능력도 부족하다는 생각만 반복했습니다(연애든 취직이든 언제나 나이가 말썽입니다;;). 그러던 차에 두번째 회사의 선배들을 만났고, 엉뚱하게도 다시 돌아가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고 나를 아는, 내가 가장 오래 만났고 완전히 익숙한 그곳으로, 만약 받아준다면 돌아가자고. 상당히 과격한 표현입니다만, 매맞는 아내의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가봐라, 나보다 괜찮은 사람 있는지" 하며 자신있게 보낸 상대에게 힘껏 콧방귀 뀌고는 "다녀봐도 너만한 사람 없더라" 하고 고개 잔뜩 숙이고는 제 발로 찾아갔습니다.

한 취업포탈사이트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2030 직장인의 13.6%가 퇴사한 회사에 재입사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사 보고는 옳타쿠나 내 얘기구나 반가워했는데 댓글을 보니 '미쳤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더군요. 하기사.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곳 말고는 나를 받아줄 곳이 없을 것 같은 그 마음을, 좋았던 것과 좋을 것만 기억나는 그 마음을 말입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제 결심만큼이나 신중하게 두번째 회사는 저를 선택해주었습니다. 새삼 우리 서로 사랑했던 시간이 거짓은 아니었구나 홀로 감격했던 기억이 나네요. ㅠ 아픔과 고난을 겪고 다시 만난 연인은 강해질 수 밖에 없는 법. 저는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아낌없이 두번째 회사에 헌신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연애는 정말이지 최고로 달콤했습니다.

누군가 새로 만나 친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미 볼 거 안 볼 거 다본 사이에는 그 많은 시간과 노력, 생략. 뭘 해야 하는지 뭘 피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 불필요한 정력낭비도 생략. 자연스럽게 다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 그 곳에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연애가 끝나는 데 주변 상황이 큰 역할을 하듯 회사를 떠나는 데도 주변의 상황이 큰 역할을 하더군요. 제가 두번째 직장을 완전히 떠난 이유가 그랬습니다. 

이제 정말 제 세번째 회사 얘기로 돌아갑니다. 다시 돌아간 회사를 버리면서까지 선택했던 회사, 가장 화려하고 불타올랐으며 그만큼 짧고 상처가 깊었던 그런 연애 말입니다.


직장 수난사 1편 - 봉사와 다름없던 첫 연애
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



by 안작가 | 2008/12/21 20:30 | 직장 수난사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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