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6일
사장님 전 상서
옥체 강녕하십니까. 오다 가다 뵈옵기로 회사 매출 좋다하니 웃음꽃 만발이시라. 옥체 역시 편안하시겠지 지레짐작 하옵니다. 매출이 좋다하믄 이 고을 곡간이 풍성해짐이니 소녀 역시 기뻐함이 마땅하겠으나 그저 무덤덤허고 가끔 속도 쓰리니 무슨 조화오리까. 대인배는 아니라도 마냥 소인배도 아닐진데 남의 집 곡간 불어남이 배아픈 게 아니라 우리 집 곡간 바닥남을 꾸짖음에 속이 상한 것이지요. 하여 자꾸 안이 뒤틀리고 욕짓거리가 불쑥 튀어나오니 더 참았다간 화병날까 싶어 미천한 소녀 몇 자 올리고자 합니다.
이제부텀 제가 올리는 말에 곡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장님이라 이르되 이는 그저 이 고을 최상석에 앉아 있는 사장님께만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바닥 차고 앉은 소녀보다 높으신 차장님 부장님 상무님께 죄 드리는 말이니 혹여 이건 아니지 싶으시더라도 다른 누가 그러려니 하여 주십시오. 사장님 억울타하면 상무님 흘겨 보시고 상무님 억울타하면 부차장님 흘겨 보시면 될 터. 잘만하면 억울한 이 있되 책임질 이 없으니 제 상스런 지껄임이 이 고을 평화에 누가 되리라 감히 생각치 아니합니다.
이 몸 광합성 필요하다 울부짖습니다. 무턱대고 야근하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얼마 전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들었나이다. 앞뒤말 잘라먹고 그냥 야근하라 하시더이다. 여덟시반 출근해 다섯시반 퇴근함이 이 고을과 저의 계약이건만 일곱시반 퇴근함도 못마땅하심이라. 퇴근 좀 일찍해보겠다고 점심마저 아니먹고 삽질을 하였으니 소녀 어리석음을 어찌 말로 다하리오. 게 대고 어제는 왜 그리 빨리 퇴근했냐 다그치시니 소녀 억울함을 또 어찌 말로 다하리오.
해가 길어짐이라. 하루가 서른시간에 낮 시간도 스무시간으로 늘어났다 생각하시옵니까. 겨우내 별 보고 나와 별 보고 들어가며 드라큘라 마냥 허옇게 질려 살았건만 어찌 꽃 피고 햇살 따사로워진 봄날에도 같은 생활이리오. 어제 비가 오심에 우산까지 챙겼건만 비는 언제 오셨다 사라지셨는지 주차장 차는 홀딱 젖었으되 가방 속 우산은 고이 접혀 쨍쨍하더이다. 이제는 해님이 어찌 생겼는지도 잊을 지경이니 점심 때 잠깐 맺는 정분에 정들까 두려워 차라리 아니 뵙는 게 낫겠더이다.
소녀 이태껏 요령 한 번 피우지 않고 일했나이다. 감히 제 입으로 말하건데 평생 어찌하면 편해볼까 머리 굴린 적 없사옵니다. 어찌하여 이 고을에서는 이를 꼭 밤 늦은 시간 퇴근함으로 뵈드려야 하는 지 어리석은 이 몸은 도통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사실 야근이 얼마나 쉬운 일이랍니까. 한 시간이면 끝날 일 세 시간으로 늘려 하면 되고 낮 시간 놀다 밤 시간 일하여도 되고 낮 시간 일하고 밤 시간 저 같이 블로그질이나 해도 되는 것을. 물론 내일 할 일 오늘 하고 한 번 생각하고 할 일 두 번 생각하라 하는 말씀 모르는 바 아니나 남보다 손이 빨라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하메 때로는 버닝하여 백이십퍼센트 풀파워로 여덟시간을 보내니 고약하다 하실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말라 죽으라는거냣 과격한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버리는 시간 아깝고 축나는 몸 아까우니 난생처음 적당히 하자 생각하나 보는 눈 많고 눈치주는 이 독해 차마 마음 먹어지지 않으니 제발 그 야속한 말씀 거두어주십시오.
정서불안 의심되옵니다. 사람 말 들어는 주십시오.
사람 말하는 데 왜 자꾸 아니 듣고 딴 데를 보십니까. 하찮은 미물도 사랑하사 보신탕은 야만스럽다 하시면서 하물며 인간인 제 말은 공중 떠다니 되 듣고 계신다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본인 말만 늘어놓고 아량 베풀 듯 그렇지 않냐 되물으시니 아니라 생각한들 그리 말할 수 있으리오. 둘만이면 불충이어도 그리하겠으나 제 앞에 버티고 선 다른 윗전 바보 만들 수 없어 그저 참는 게 여러번인 것을 어찌 몰라 주십니까.
제가 부족하여서 그렇지요. 생각하신 바 미리 따지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진행하니 제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몸이 부서지고 어디서 어떤 욕을 들어먹든 아니라 하신 일은 고쳤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변화가 아무리 잦고 아무리 찰나의 직관에 의한 것이어도 그래서 미천한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따라갈 수 없고 딸린 일꾼 십여명이 온전히 헛일한 것이어도 높은 분 말씀이니 잘못했다 빌어야 하는 것이지요. 돈도 못버는 하찮은 소녀가 어디 감히 틀렸다 말하리오.
허나 저도 생각이 있는 인간이고 그 생각으로 일하겠다 왔습니다. 똑같은 말 몇번째인지 헤어릴 수 없으나 한번도 그리하자 하신 적 없으니 이제 이 몸이 말을 하지 말아야 하나 봅니다. 아무것도 모르오 바보로 살자 해봤으나 먼저 올린 말 되돌아 와 본인 생각인양 이리 하자 하시고 그리해 잘되면 본인 탓 으쓱하고 안되면 제 탓이라 역정 내시니 소녀 억울해서 더는 이렇게 못삽니다.
끓어오르는 울분 내쳐 표현하자하니. 그냥 뒤치닥거리나 하라 하십시오. 의견 묻지 마십시오. 경험이라 하시지만은 독단입니다. 장악력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안 일 신경쓰셔도 곪은 상처 못보시니 차라리 바깥 일 챙기십시오.
소녀 그런 말 많이 들었습니다. 너 하나 없다고 이 고을 잘못 돌아가지 않는다.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미천한 소녀가 뭐라고 저 한 몸에 휘청하길 기대하겠습니까. 행여 꿈도 꾼 적 없음입니다. 허나 감히 말씀 드리건데 그것은 상전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신지요. 그 권력 위대하사 팔아넘길 수도 없애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이 고을 결코 상전 것이 아닙니다. 백년만년 그 권력 누릴 수 없고 업이 되어 되돌아옴을 어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소풍나갈 적 놀이까지 참견하며 다같이 즐거워보자 하시지만은 어찌된 일인지 상전만 즐거우시고 소녀를 비롯한 아랫것은 괴롭기만 합니다. 남의 집만 칭찬하고 아비마저 집나간 저희 집은 구박하시니 다들 죄인된 심정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음이오. 매일 밭에 나가 삽질함은 같은데 곡식 캐는 이들만 칭찬하시고 돌 고르고 비료 뿌리는 이들은 어찌 무시하나이까. 청컨데 그들에게 돌 고르고 비료 뿌리메 남는 시간 곡식까지 캐라하지 마십시오. 그들 땀도 똑같음을 알아주십시오.
소녀 어찌어찌 돌 고르는 이들 중 곡식 나는 땅을 조금 맡았습니다. 험한 땅이라 곡식 잘 나지 않아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윤택하게 가꿔보자 한마디만 듣는다면 힘이 날 것을. 어리석은 소녀는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그 땅에서 여기 캐봐라 저기 캐봐라 무심한 손가락질에 하릴없이 눈물 흘리며 삽질입니다. 마음 해져 돌아보니 저희 집 사람들 모두 그러하더이다.
안은 이만하면 됐습니다. 내버려두면 더 잘 굴러갈 것을 못 믿겠다 마시고 괜한 참견 마시고 놓아두십시오. 곁에 있으나 상전 눈치 보느라 부러진 삽 들고 낑낑거림을 알지 못하시니 차라리 그 시간에 땅을 더 얻어오든 트렉터를 구해오든 바깥 일에 힘쓰십시오. 아랫것들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분께 충성을 맹세하라 강요하지 마시고 스스로 더 높은 자리로 오르십시오.
무엄하게 아무렇게나 지껄였으나 소녀의 간절함은 진실이오니. 부디 한 구절이라도 가 닿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허긴. 나랏님도 아니 그러는 마당에 이 작은 고을님이 그래주시겠냐마는 말입니다.
# by | 2009/04/16 18:55 | 직장 수난사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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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성 있으라고 사장님이라 썼더니 괜히 회사에서 사장님 얼굴보기 죄송했다는 ㅎㅎ
반은 재미로 반은 진정 억울하다 생각해서 썼지만 사실 어느 조직, 어느 회사가 안 그렇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