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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

아무리 심지가 굳은 열녀라도 말이죠. 지치고 힘들 때는 다른 남정네의 따스한 품이 좋지 않을리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평범 그 자체인 보통여자라면 쏟아지는 장대비는 피하고 보기 마련이죠. '오빠 믿지?' 정도의 얕은 수작에 제가 넘어간 것도 결국 그런 이치(?)였습니다. 뒤늦게 계몽되어 날카로운 현실에 눈을 뜬 저는, 서둘러 비 피할 곳을 찾았고 그때 한 주선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개팅에서 제일 중요한 건 주선자라고 생각합니다. 주선자의 설레발이 당사자의 없던 감정까지도 만들어 낸다구요. 만나기도 전에 "네게 딱 맞는 사람이야" 하고 밑밥 깔아놓으면 호감도는 무한 상승하고, 그저 만나서 그저 만났다는 감상 정도만 갖고 있던 당사자들에게 주선자의 따뜻한 거짓말은 "상대가 맘에 들어한다는데 나도 마음 좀 열어볼까나"하는 너그러움을 던져주게 됩니다. 두번째 직장을 소개해준 당시의 주선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회사에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그만 우쭐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회사의 눈물겨운 치맛자락 잡기 - 연봉인상, 4대 보험 가입, 이직할 회사에 대한 소극적 험담 - 에도 불구하고 '당장 사표내기'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첫번째 연애는 제게 많은 것을 알려준 듯 했어도 여전히 연애 당사자 선택의 기준을 명확히 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 번 데인 곳을 다시 데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니 끝내 퇴직사유는 아니었던 연봉은 여전히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저 존폐가 염려되는 회사가 아니라면 좋겠다는, 나아가 좀 번지르르한 회사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때마침 주선자가 들고온 상대는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국민의 90%(좀 많은가??)가 아는 회사였습니다. 그런 회사를 힘겨운 구직 활동 없이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행운이었죠. 당시의 착각들 - 그 회사에 내가 필요한 존재라든가, 스카웃되는 것이라든가 - 이 사실이었다면 말입니다.

잘나가는 상대는 만나기도 어렵지만 간택(?) 당하기는 더 어렵다는 걸, 나의 겸손함보다 더 못났다는 지적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이때 알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 화려한 명함을 얻기 위해 6개월간 티오가 나기를 기다려야 했고 초라한 첫 연봉보다 40%나 삭감된 급여로 6개월 인턴부터 두번째 연애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물론 6개월 유유자적 백수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저는 철썩같이 이것은 스카웃이라고 믿고 있었죠. 네, 바보였습니다. 6개월 후 제게 닥친 현실에 경악하면서도 6개월 기다린 게 아까워서, 여전히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홀려 눈 딱 감을만큼 바보였습니다.

사실, 이 두번째 연애는 꽤나 달콤했습니다. 정사원이 되기까지 1년이 걸린 탓에(6개월 인턴 뒤에 6개월 수습 기간이 있었습니다) 본전 생각이 자꾸 들긴 했지만 거의가 또래들이었던 동료들과의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초반 몇달은 토요일에도 나와야 했지만 이미 겪은 일이니 상관 없었고 당시 업무의 속성 상 한달에 한번은 밤을 꼴딱 새야 했지만 다음날 출근을 자초했습니다. 토요일 근무가 없어진 후 몇달은 아침 7시까지 출근해야 했고 아침 7시 출근이 사라진 후에는 한달에 한번 정도 주말 근무가 있었죠. 근무일은 주 5일이었지만 주중 근무시간은 일반 회사보다 한 시간 더 많았습니다. 보너스는 없었고 월급의 일부는 팀비용으로 납부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악조건(그래도 화장실 청소에 커피 심부름까지 했던 데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랄까요? 아, 눈물이...). 반면 지친 마음을 부비적 거릴 선배들과 동기들이 있었고 점심시간은 자연스럽게 1시간 반을 넘기는 일이 많았으며 퇴근시간은 칼이었습니다. 운 좋게 저도 모르는 사이 황금라인에 올라타 있기도 했지요.

두번째 회사는, 말하자면 매너 좋은 한량이었습니다. 허우대 멀쩡하고 돈도 많아 보이는 데다 매너도 좋아 사람은 홀리는데 그만큼 소문이 많고 붙어 있으려니 영 불안했죠. 내가 몇번째 여자인지 확인할 길이 없고 무슨 꽃이든 되려면 이름을 불려야 해서 나팔꽃도 됐다가 장미꽃도 됐다가 정신 없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저는 무려 4개 부서에서 완전히 다른 일이나 별다른 기술은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맡았습니다. 일은 잘 했고 제법 인정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박봉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좋았고 편하게 회사 생활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곳은 완전히 익숙했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직이 바뀔수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은 모호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네 번째 보직을 받아들었을 때, 저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직장생활은 더 능수능란해 졌지만 여전히 글 좀 깨작거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언제고 버림받는다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위자료 몇 푼에 고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사랑만 먹고 살던 저는 여전히 가난한 주머니 사정과 함께 거의 성장하지 않은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결코 본처로 삼아주지 않을 그 매력남과 본처가 될 생각 밖에 없었던 초라한 제 자신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2년 7개월 여간의 연애를 마치고 저는 이제 연애상대자 쯤 스스로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제 자신을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멋진 여자가 되어 멋진 남자를 만나겠다는 그런 유치한(?) 발상이었죠. 하지만 멋진 여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멋진 남자는 언제나 누군가의 남자이지 않겠습니까? 멋진 여자의 정의와 멋진 남자의 정의, 그 멋진 남자가 바라는 멋진 여자의 정의 따위를 고민하다, 저는 세번째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세번째 직장에 흘러들어갔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불타올랐으며 그만큼 짧고 상처가 깊었던 그런 연애의 시작이었습니다.



직장 수난사 1편 - 봉사와 다름없던 첫 연애

by 안작가 | 2008/12/09 13:48 | 직장 수난사 | 트랙백 | 핑백(3)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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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여자' 였다는 꼬리표로 평생 달리게 될 줄도 모르고, 첫 번째 회사보다 더 냉혹한, 혹은 더 현실적인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 ... more

Linked at 습.작. : 직장 수난사 2-.. at 2008/12/21 20:30

... 지 선택했던 회사, 가장 화려하고 불타올랐으며 그만큼 짧고 상처가 깊었던 그런 연애 말입니다. 직장 수난사 1편 - 봉사와 다름없던 첫 연애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 ... more

Linked at 습.작. : 직장 수난사 3편.. at 2008/12/29 19:43

...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발 디딘 자리에서 적응하며, 또 웃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직장 수난사 1편 - 봉사와 다름없던 첫 연애직장 수난사 2편 - 거죽은 번지르했던 회사와의 두번째 연애직장 수난사 2-1편 - 매 맞는 아내의 마음? ... more

Commented by hazee at 2008/12/10 10:03
크릉
Commented by Judy at 2008/12/24 00:53
잠깐.. 울고 오겠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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