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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도, 좋습니까

아래 글은 아마도 올 초, 대학 동아리 학회지에 주었던 글이다. 백수에게 글 좀 달라고 해서 뭘 써야 하나 고민하다 쓴 글인데, 힘들어서 회사에도 안 가고 48시간 잠만 잤다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문득 이 글이 생각나 찾아봤다.

호기롭게 선택했어도 언제나 나는 직업이 없는 상태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를 다독이려는 시도가 철 없는 자기위안 같아 불편했다. 누군가 호되게 질책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무작정 길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은 언제나 곤혹스러운 법이다.

그 사람에게 그동안 힘들었다고, 잘했다고, 어린 것도 어리석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의연하게 이겨내고, 지난 후에 웃을 수 있도록 더 강해지기를. 당신은 월드챔피온이니까.


<<쉬어도, 좋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중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보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여 년 전 문득, 나는 내가 참 어정쩡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곧잘 했지만 이제껏 한번도 1등은 해본 적 없었고, 모든 예체능에 예외 없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업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인정은 받은 적 없었다. 대학도, 직장도, 직장 내 위치도 만족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당장 이 어정쩡함을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나아가지도 벗어나지도 못하는 고립된 길 안에 놓일 것만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무작정 야구장으로 향했다. 내 머리 위로 예정대로 공이 날아오길 기다렸다. 내 다음 스텝이 꼭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직장은 작은 정치광고회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직장'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곳에 있던 1여 년 간 나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때로는 11시까지, 12시까지 눈앞의 일들을 치워갔다. 일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정말 오래 잠을 잤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주인공이 회사에서 짤린 후 몇 날 며칠 잠만 잤던 것처럼 밀린 잠을 다 자겠다는 기세였다. 충분히 자고 일어났을 때 밀려든 것은 일종의 패배감이었다. 남들과 조금도 달라지지 못한 나에 대한 자책과 조롱이 긴 잠에서 깬 멍한 상태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팬클럽의 주인공은 한껏 느린 야구를 즐기게 됐지만 나는 더 빠른 야구를 배울 정신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직장은 알만한 닷컴 회사였다. 각오와 달리 선택에 있어서는 여전히 어떤 비장함도 없었다. 그곳에서 있던 2년 6개월 간 역시 하루 14시간이든 15시간이든 눈앞의 일들을 치워갔다. 그 2년 6개월의 기억이 온통 회사일 정도로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리고 문득, 내가 참 어정쩡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많이 들떠 있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빛나던 십대의 당당함이 혹은 무모함이 다시 나를 이끌 거라 믿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열정에 차 있었고 들 떠 있었고 곧 뭐라도 될 것처럼 자신있었다. 동시에 왜 나를 향해서는 운명 같은 공이 날아오지 않을까 수없이 생각했다. 믿었던 조우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어정쩡한 채였다.

불안정했기에 열정적이었던 유예의 시간을 보내고 소속 없이 시간을 보낸 지 보름 째 되는 날부터 아버지 공장에서 일을 거들었다. 눈앞에 지나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보고 있으니 [달의 바다]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5년째 언론사 시험에 낙방한 주인공은 결국 할아버지의 ‘이대갈비’에서 서빙을 한다. “불판을 제 때 갈아준다고 다들 좋아한다”는 구절을 읽고 피식 웃었더랬다. “꿈꾸던 곳에 가까이 가본 적 있나요?”로 시작하는 그 소설은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로 끝을 맺는다. 

숙련공들 사이에서 일을 하다 보면 어쩌다 한 번 와서 거들뿐인 나는 그들보다 2배는 더 바쁘다. 어깨가 빠질 것 같고 손끝도 저릿하다. 그런데도 밀리지 않으려 어느새 기를 쓰고 있다. 화장실 한 번 다녀오지 않고 5시간을 버티는 건 수험공부를 할 때도 하지 않은 짓이지만 여기선 매일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은 업무의 종료로 정해진 시간까지 미뤄놓는다.

쉬지 않고 일하니 금방 몸살이 났다. 이 끝없는 일에 앓아눕기까지 했으니 일꾼으로선 아웃이다. 열심히 일한 게 억울하다 하니, 미련하게 일한 내가 바보 같다 한다. 하지 말아버릴까 하니 그러면 어떤가 싶고, 적당히 할까 하니 그러면 또 어떤가 싶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긴 잠을 자던 때가 생각났다. 좀 더 자도 좋을 것 같았다.

 


 

by 안작가 | 2009/09/18 15:26 | 직장 수난사 | 트랙백 | 덧글(0)

Journey to Croatia! D-10

크로아티아로 늦은 여름 휴가를 떠납니다. 

이제 열흘 남았네요. 기대나 설레임보다는 남아있는 워크데이 8일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 지 걱정입니다. 제 영혼은 절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 걸까요? 목적 없이 휘청 거린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계절이 바뀌는 바람에 생체리듬도 변했는지 슬럼프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떠나는 날이 오기 전까지 떠나 있는 열흘 동안 정리할 것들을 잘 챙기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를 열흘의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충동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행이 무산되면서 어디든 떠나고 싶어 안달하던 차에, 우연히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라는 책이 제 손에 들려졌고 그 자리에서 이 곳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결정했어요. 그래도 동행하는 친구 위니가 아니었다면 떠나는 것이 이렇게 쉽지는 않았을 거에요. 크로아티아에 가겠다는 제 한 마디에 동행을 결정해주고 티켓을 알아봐 주었거든요. 당시의 저는 여행은 가고 싶었지만 에너지는 바닥인 상태였기 때문에 혼자였다면 분명 차일피일 미루다 나고야나 다녀왔을 거에요. 뭐, 나고야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동행이 있다는 건 꽤나 든든하고 호들갑스럽고 게을러지는 기분입니다.

크로아티아는 이탈리아의 맞은 편, 아드리아해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면적이 한반도의 1/4 정도라고 하구요. 90년대 초까지 내전이 있었던 나라죠. 크로아티아에 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세 가지인데, 1) 어디? (크로아티아라는 나라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 2) 크로갑 고향이잖아 (격투기를 좋아하는 소수 남자들의 반응), 3) 총 맞는 거 아냐?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고 신문 좀 본 나이 많은 사람들의 반응) 입니다. 어떤 반응이든 여행지로서의 기대가 전혀 없는 반응이죠. 그래서 약간은 발굴했다는 뿌듯함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여행을 열심히 다니는 분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여행지가 아니지만요.

25일 밤 11시 55분 비행기로 떠나 10월 5일 오후 3시 정도 들어옵니다. 직항은 없기 때문에 이스탄불을 거쳤다 가고 들어오는 길에 이스탄불에서 이틀 머물 예정이에요. 자그레브와 플리트비체, 스플릿, 흐바르섬, 두브로브니크를 둘러볼 생각입니다. 저도 그렇고 동행하는 위니 역시 여행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떠나는 성격이 아니라 이스탄불의 숙소와 이동경로만 정해놓은 상태입니다. 크로아티아는 민박이 활성화되었다고 하니 숙소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설사 애를 먹는다 하더라도, 여행이잖아요. 머리와 마음이 쉬라고 떠나고 또 머무는 곳에서 이곳에서와 똑같이 목적과 결과 따위를 신경쓰는 건 꽤나 불행한 일인 것 같아요.

열흘 남았습니다. 무계획 하에 맞닥뜨리게 될 낯선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은 그때의 즐거움으로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때까지는 해결해야 할 지금의 과제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말 하나. 출국 때까지 신종플루 걸리지 않기!!
덧붙이는 말 둘. 지중해성 기후란 도대체 뭘까요? 9월 말에도 해수욕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잔뜩 해수욕 도구를 챙겨갈 생각인데 너무 추워서 긴팔입고 파도 구경만 하다 오는 건 아닐까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요.




by 안작가 | 2009/09/15 11:46 | - 엉망진창 크로아티아 여행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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